눈이 깊어질 때

2005. 8. 4. 08:41 from daily log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장면


이 장면은 비오는 날 우산 없는 정원(한석규)에게 다림(심은하)이 우산을 씌워주고는 그 댓가로 술을 사 달라 해놓고 바람맞춘후 몇일 후에 찾아와서는 자는 사람 옆에 앉아 깨워놓고 그날 오지 않은 이유를 변명하는 장면이다. 왜 안왔냐면 그냥 안왔단다.

지난 초여름에, 이 영화를 두고 강의를 하던 모 교수가 이 장면을 설명하기를 '다림이의 눈이 깊어지는 때' 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말인가 하니, 친근함과 호기심의 시기를 지나 정원을 이성적 존재로 느끼게 되고 난 후의 시선이란 뜻이란다.
뭐 이미 봤던 영화에서 기억에서 없어진 줄거리를 되살리며 한참 중계방송을 듣던 나는 그 말에서 순간 흠칫 해버렸다. 그리고 순간 뇌리에 박힌 이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비 오던 날, 정원과 다림이 작은 우산(혼자써도 작다!)을 같이 바짝 붙어 쓰고 난 후에 다림이 정원에게 드디어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원래 다림 성격이 솔직한데, 이날 아무말도 없이 약속을 어긴(술사달라는) 다림의 행동은 다림이의 마음속에 어떤 고민이 생겼고 이 때문에 나타난 돌출행동일 것이다.

'나는 당신이 좋아졌는데, 당신은 나를 좋아하나요?' 라는 다림이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상대에게 원하는 때에 다림이 정원을 바라보는 저 시선이 바로 '다림이 눈이 깊어지는 때' 이다.

ps. 내가 정원이라면 그 '때'를 무슨수로 아냐? 나도 모른다.



추가.
오랫만에 다시 영화를 보니, 허진호 감독의 주제를 알 것 같다.
사랑이 변하냐고 묻던 봄날은 간다에서도 그렇고, 그 영화보다 앞서 제작한 이 영화에서도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라고 말한다.
디지털 단편 모음집 '이공(異共)'에서도 허진호 감독은 영원하지 않은 두 관계의 마지막을 그려놨다.
상대의 차를 긁어버리고 속마음의 화를 풀던 관계의 끝이나, 사랑함에도 어쩔 수 없는 죽음 때문에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 사랑이나,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내가 결론을 내기에는 내가 아직 젊다는 것이다.
Posted by adagiet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