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ua de Beber/Bossa Nova
Ana Caram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겨울이었다. 아마 2월 지금쯤이었을거다. 형섭이형을 그때 처음 만났다. 기억이 맞다면 아마 동대문 운동장 부근이었을 것이다. 풋풋한 국문과 학생의 지금은 절대 맞지 않을 더플코트를 입고 있던 형섭이형과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지하철역에서 조우한 후 패스트푸드 점으로 들어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며 내 첫인상을 전했다. '생각외로 착하게 생겼네'
우리가 만난 이유는 형섭이형이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줄 중고 오디오를 고르러 가는 길에 나는 그동네 구경도 할겸 해서 동행했던 것이다. 좁은 매장을 피해 길가에 내놓은 무수히 많은 중고 오디오들.. 매장 깊숙히 전시된 말로만 듣던 누런 호박색의 탄노이 궤짝들과, 너무 커서 넣어두기 힘든 혼 트위터 등등 한마디로 별천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오디오 파는 동네는 눈뜨고도 코 베이는 곳이라 중학생때 친구가 용산 터미널 상가에서 바가지를 옴팡 뒤집어쓴 경험을 상기하며 우리는 가게들을 탐색했다. 좁은 골목길, 낡고 좁은 상가들, 바깥에 내놓은 빛바랜 엘피 자켓들, 또 그만큼 나이 많은 점포 주인들을 눈으로 훑으며 이곳 저곳 매장에서 이것 저것 찔러보다 어떤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은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들어보고 싶다는 스피커는 연결의 수고로움을 내색하지 않고 들려주었다. 앳 되 보이는(?) 학생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이런 저런 기기들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가 사야할 것은 형섭이형이 선물할 크기도 작고 일단 소리보다 디자인이 좋아야 하는 여성용이며 특히 가격이 중요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사야할 것은 관심밖이고 이것 저것 구경하기에 바빴다. 무엇보다도 나는 거기서 오디오를 살 생각이 전혀~ 결코 없었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고 이것 저것 듣다보니 기왕 먼 걸음 한거, 여기보다 싼곳은 별로 없다는거, 그리고 집에서 쓰는 남에게 얻어온 북셸프 크기의 산요 스피커와는 상대가 안되는 소리에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해서 주머니에 돈도 좀 있겠다, 잠깐의 고민은 요식행위일 뿐 결국 내 소유의 첫 오디오 기본세트 - 앰프, 시디피, 스피커를 사버렸다.
탄노이, 셀레스천, 마크레빈슨, 매킨토시, JBL, BOSE, AR 등등등.... 을 상상하며 실용오디오를 탐독하던 시절에 고작 집에 사다 놓은 것은 롯데 스피커, 인켈앰프와 인켈 시디플레이어 였다. 당연히 내가 알 턱이 없는 제품들이었다.
롯데 스피커는 더블 우퍼에 주인장 말로는 티타늄 트위터를 썼다는데 제품 번호는 생각이 안나지만 생김새는 아직도 인기 좋은 LS-818과 닮았다. 이 스피커를 고를때 주인아저씨가 소개해 주는 몇개의 스피커들 중에 내가 살 수 있는 금액으로 추천해준 제품인데, 처음 그 스피커를 가게에서 듣는 순간 형섭이형과 나는 넋을 놓아버렸다. 내가 무언가를 처음 듣고 정신을 놓은건 이전에도 두어번 있었지만 그때는 실제 악기였다. 곡의 제목은 모르지만 피아노 연주에 우리 둘다 넋을 놓았다. 주인아저씨는 프로였다.
인켈앰프,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아저씨가 추천해준 걸로 들고 왔다. 얼마나 무겁던지 부피 대 중량비로 따지자면 상대가 될 만한것은 '돌' 밖에 없을정도로 무거웠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 가뜩이나 눈이 많이 와 미끄러운 길을 구두를 신고 뒤뚱대며 용인까지 들고 내려왔다. 무거우니 들고갈때 편하라고 주인아저씨가 친절히 묶어준 노끈을 붙잡고 지하철을 타고나니 다른 승객들이 다 쳐다본다. 7,80년대 영화에나 나올법한 저런걸 선물상자처럼 묶어 들고가는 젊은 사람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암튼간에 집에 들여와 쟁여놓고 택배로 받은 스피커를 연결해 몇일 밤낮을 잘 들었다. 하지만 이놈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낮은 볼륨에서 한쪽 스피커에서 잡음이 흘러나오며 나왔다 안나왔다를 반복했다. 속으로 '당했구나' 하며 명함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주인아저씨 왈 별것 아니란다. 간단한 문제니 동네 전파사에서 수리 받으란다. 아니면 들고 오란다. 뭐? 이 무거운걸 들고 또 거기까지 갔다 오란 말인가? 이놈의 앰프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가뜩이나 촌스럽게 생긴것이 작동까지 말썽이니 속았다는 기분을 지울수가 없었다. 결국 샀던 곳으로 들고가 점검해보니 주인아저씨 예상대로 내 앰프에서 고장난 부품은 '릴레이' 였고 마침 그 가게에 동일한 부품이 없었다. 아저씨가 부품을 수배하는 사이 잽싸게 만원 더 주고 다른걸로 바꾸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그 뒤로 몇년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처음 샀던 그러니까 교환하기 전의 그 앰프가 이른바 '가난한 자의 매킨토시'라 불리우는 AD280b 였다. 물론 내가 샀을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인터넷에서 모이고 또 많은 정보가 교류되면서 그 앰프의 인기는 급상승 했고 중고 가격도 내가 샀던 가격의 두세배로 치솟았다. 아직도 주인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이거 참 좋은 물건인데...." 그리고 나중에 알게된 또 하나. 릴레이 고장은 정말 '별 것 아닌 고장이다'.
생각해보면 그때 그 가게 주인은 참 좋은 분이었다. 물건값을 깎아주거나 친절해서가 아니라, 젊고 어수룩한 가난한 손님에게 적당한 좋은 물건을 소개시켜주는 그런 주인 말이다. 가게 이름은 현음사, 지금은 남아있지 않을것이다.
그렇게 앰프와 스피커를 집에 갖다 놓고 틀어본 것이 이 '체스키 귀그림 시디' 이다. 당시에는 이 시디가 국내에서 귀했다. 파일로 어찌어찌 구해서 좁아터진 방구석에 톨보이 사이즈의 스피커를 놓고 그 앞에 앉아 해설을 들어가며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나는 트랙이라곤 레베카 피죤의 스패니쉬 할렘과 아나 카람이라고 소개하는 황인용씨의 목소리 뿐이다.